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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팔레올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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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족으로, 1409년에 태어나 1465년에 사망했다. 그는 마누엘 2세의 아들로, 형제들과 모레아 데스포트령을 분할 통치했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모레아를 잃고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교황청의 지원을 받으며 십자군을 호소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의 딸 소피아는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와 결혼하여 러시아 제국의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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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팔레올로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토마스 팔레올로고스
로마자 표기Thomas Palaiologos
묘사비오 2세의 앙코나 도착을 다룬 핀토리키오의 프레스코화 중 일부 (시에나 대성당 소장)
서명Signature of Thomas Palaiologos.jpg
작위 정보
작위모레아 전제공
재위 기간1428년–1460년 (1465년 5월 12일까지 사망할 때까지 작위 주장)
전임자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후임자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 (명목상)
섭정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1428년-1443년)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1428년-1449년)
데메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1449년-1460년)
생애 정보
출생일1409년
출생지콘스탄티노폴리스
사망일1465년 5월 12일
사망 장소로마
매장지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가문 정보
왕조팔레올로고스 왕조
아버지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어머니옐레나 드라가시
배우자카테리나 자카리아
자녀옐레나 팔레올로기나
조에 팔레올로기나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
마누일 팔레올로고스
기타 정보
종교가톨릭/정교회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서명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서명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핀토리키오가 그린 시에나 대성당의 비오 2세의 앙코나 도착 프레스코화에서 발췌

2. 초기 생애와 데스포트 임명

15세기 초반 필사본의 미니어처. 토마스의 아버지인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 어머니 헬레나 드라가시, 그리고 세 명의 형제인 요한(후일 황제 요한 8세), 테오도로스, 안드로니코스를 묘사하고 있다.


14세기 동안 비잔티움 제국이 쇠퇴하면서,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황제들은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고 데스포트 칭호를 부여하여 통치와 방어를 맡기는 것이 남은 영토를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재위 1391~1425)는 유아기를 넘긴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요한은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단독 황제가 될 예정이었다. 둘째 아들 테오도로스는 모레아 데스포트령 데스포트로, 셋째 아들 안드로니코스는 1408년 여덟 살의 나이로 테살로니키 데스포트로 임명되었다. 마누엘의 막내 아들들인 콘스탄티노스, 데메트리오스, 토마스(1409년 출생)는 할양할 땅이 부족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았다. 이들은 황궁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의 포르피로게네토스 칭호를 받았는데, 장차 황제가 될 요한에게는 없었던 칭호이다.

1417년 9월, 토마스는 8세의 나이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모레아 데스포타토에 파견되어 이후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비록 어렸지만, 미래의 공동 통치를 염두에 둔 파견이었다. 1428년, 형 테오도로스 2세가 은퇴 의사를 밝히자, 요안니스 8세는 콘스탄티노스 데스포타스(훗날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와 함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방문했다. 그 결과 테오도로스 2세, 콘스탄티노스, 토마스의 3인 공동 통치 체제가 출범하였다. 토마스는 칼라브리타에 행정부를 설치했다.

토마스는 형 콘스탄티노스와 협력하여 아카이아 공국 세력을 정복하는 임무를 맡았다. 1429년 콘스탄티노스가 파트라 대주교령을 포위하자, 토마스는 첸투리오네 2세 아산 자카리아의 거점인 할란드리차를 공격했다. 첸투리오네 2세는 딸 카테리나와 토마스의 결혼, 그리고 딸의 지참금으로 아카이아 공국 전체를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1430년 1월 미스트라스에서 토마스와 카테리나의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같은 해 8월 토마스는 정식으로 데스포타스에 임명되었다.

토마스는 공동 통치자인 콘스탄티노스와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콘스탄티노스가 주도하는 정책을 도왔다. 1444년에 시작된 콘스탄티노스의 중앙 그리스 원정과 1446년 오스만 제국 무라트 2세의 침공을 막는 전투에서 토마스는 콘스탄티노스를 측면에서 지원했다.

2. 1. 형제들과의 관계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재위 1391~1425)는 아들들에게 영지를 할양하고 데스포트 칭호를 부여하여 제국을 유지하려 했다. 장남 요한은 공동 황제이자 후계자로, 차남 테오도로스는 모레아 데스포트령의 데스포트로 임명되었다. 셋째 아들 안드로니코스는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트가 되었다. 막내 아들들인 콘스탄티노스, 데메트리오스, 토마스는 할양할 땅이 부족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았다.

팔레올로고스 형제들 간의 관계는 항상 원만하지는 않았다. 요한과 콘스탄티노스는 사이가 좋았지만, 콘스탄티노스는 데메트리오스 및 토마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1428년, 요한 8세는 콘스탄티노스를 모레아 데스포트로 임명했지만, 테오도로스가 데스포트 지위를 포기하지 않아 모레아 데스포트령은 두 명이 통치하게 되었다. 얼마 후, 토마스도 모레아 데스포트로 임명되면서, 하나의 데스포트령이 세 개의 작은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테오도로스는 미스트라스에서 콘스탄티노스나 토마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대신 콘스탄티노스에게는 아이기오, 라코니아 남부 요새와 도시, 칼라마타, 메세니아를 포함한 땅을 주었고, 콘스탄티노스는 글라렌차를 수도로 삼았다. 토마스는 북쪽 땅을 받고 칼라브리타 성을 근거지로 삼았다.

2. 2. 모레아 데스포트 임명

1428년, 형 테오도로스 2세가 은퇴하여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하자, 요안니스 8세는 동생 콘스탄티노스 데스포타스(훗날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와 함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방문했다. 그 결과 테오도로스 2세, 콘스탄티노스, 토마스 3인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체제가 시작되었다. 토마스는 아직 데스포타스(전제군주) 칭호는 없었지만 통치에 참여하여, 칼라브리타에 행정부를 설치했다.

토마스의 첫 임무는 형 콘스탄티노스와 협력하여 반도에 남아 있던 아카이아 공국 세력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1429년, 콘스탄티노스는 파트라 대주교령을 포위했고, 토마스는 아카이아 공국 공작 첸투리오네 2세 아산 자카리아(재위: 1402년 - 1432년)의 거점인 할란드리차를 공격하여 측면을 지원했다. 전황은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첸투리오네 2세는 딸 카테리나와 토마스를 결혼시키고, 딸의 지참금으로 아카이아 공국 전체를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1430년 1월 미스트라스에서 토마스와 카테리나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같은 해 8월, 토마스는 정식으로 데스포타스에 임명되었다.

토마스는 공동 통치자인 콘스탄티노스와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콘스탄티노스가 주도하는 정책을 지원했다. 1444년에 시작된 콘스탄티노스의 중앙 그리스 원정과 1446년 오스만 제국 무라트 2세의 침공을 막는 전투에서 토마스는 콘스탄티노스를 측면에서 지원했다.

3. 모레아 통치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모레아의 데스포트로 재임하는 동안 영토 확장에 힘썼다. 제4차 십자군 이후 아카이아 공국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대부분을 지배했지만, 토마스와 그의 형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이 지역을 점차 잠식해 나갔다. 1432년, 토마스는 아카이아 공작 첸투리오네 2세 자카리아의 딸 카타리나 자카리아와 결혼하여 아카이아 공국의 멸망을 이끌었다. 첸투리오네 2세가 사망하자 토마스는 그의 남은 영토를 모두 장악했다. 1430년대에 토마스와 콘스탄티노스는 베네치아 공화국 소유 항구 도시들을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반도 대부분을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 두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2세는 모레아에서의 비잔티움 세력 확장에 불안감을 느꼈다. 1431년, 튀르크 장군 투라한 베이는 모레아의 데스포트들에게 술탄의 봉신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헥사밀리온 성벽을 파괴했다.

1432년, 콘스탄티노스는 토마스에게 자신의 요새 칼라브리타를 양도하고 엘리스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1435년, 콘스탄티노스가 수도로 소환되자, 그의 형 테오도로스 2세는 콘스탄티노스가 공동 황제이자 지정된 상속자가 될 것이라 믿고 반대했다. 콘스탄티노스와 테오도로스의 불화는 143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그레고리우스 3세가 중재하여 해결했다. 1443년, 콘스탄티노스는 테오도로스에게 셀림브리아 통제권을 넘겨주고, 테오도로스는 모레아 데스포트 지위를 포기하여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가 모레아의 유일한 데스포트가 되었다.

형제들은 모레아를 강화하고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주장처럼 "새로운 스파르타"로 만들고자 했다. 그들은 1431년 파괴된 헥사밀리온 성벽을 1444년 3월에 완전히 복원했다. 그러나 1446년, 콘스탄티노스가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술탄의 성벽 철거 요구를 거부하자 튀르크인들이 다시 파괴했다.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최대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성벽을 방어했지만, 튀르크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두 사람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투라한 베이는 미스트라스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스의 영토를 황폐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파견되었고, 무라트 2세는 펠로폰네소스 북부에 자신의 군대를 이끌었다. 무라드는 모레아를 정복할 의향이 없었고 단지 공포를 심어주고자 했기 때문에 튀르크인들은 곧 황폐하고 인구가 감소한 반도를 떠났다.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무라드를 주군으로 받아들이고 조공을 바치며 다시는 헥사밀리온 성벽을 복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1448년, 테오도로스 2세와 요안니스 8세 황제가 사망했다. 토마스는 헬레나 드라가시와 함께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지지하여 그의 즉위를 실현시켰다. 이후 토마스는 디미트리오스와 함께 모레아 데스포타트를 공동 통치했다. 디미트리오스는 미스트라스를, 토마스는 코린토스와 북서부를 통치하며 파트라스 또는 레온타리를 수도로 사용했다.

1451년, 무라트 2세가 사망하고 메흐메트 2세가 술탄이 되었다. 145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공격 준비 단계에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모레아에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투라한 베이를 보내 모레아를 황폐화시켰다.

3. 1. 아카이아 공국 정복

토마스의 첫 번째 임무는 형 콘스탄티노스와 협력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남아 있는 아카이아 공국 세력을 정복하는 전쟁이었다. 1429년, 콘스탄티노스는 파트라스 대주교령 포위전에 나섰고, 토마스는 측면을 지원하는 형태로 아카이아 공작 첸투리오네 2세 아산 자카리아 (재위: 1402년 - 1432년)의 거성 할란드리차를 공격했다. 전황은 유리하게 진행되어, 첸투리오네 2세는 딸 카테리나와 토마스의 결혼, 그리고 딸의 지참금으로 아카이아 공국 전토를 넘기는 데 동의했다. 토마스와 카테리나의 결혼식은 1430년 1월 미스트라스에서 거행되었다. 같은 해 8월, 토마스는 공식적으로 데스포타스에 서임되었다.

3. 2.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토마스는 공동 통치자인 콘스탄티노스와 좋은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콘스탄티노스가 주도하는 정책을 도왔다. 1444년에 시작된 콘스탄티노스의 중앙 그리스 원정, 1446년 오스만 제국 무라트 2세의 침공에 대한 방어전에서 토마스는 콘스탄티노스를 측면에서 지원했다.

토마스와 그의 형제 콘스탄티노스가 1444년 모레아 방어를 위해 복원하고 1446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파괴된 헥사밀리온 성벽 유적


1431년 테살리아를 통치하던 튀르크 장군 투라한 베이는 모레아의 데스포트들에게 그들이 술탄의 봉신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헥사밀리온 성벽을 파괴했다. 형제들의 데스포타트 강화 계획 중에는 1431년 튀르크인들에 의해 파괴된 헥사밀리온 성벽을 재건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함께 성벽을 완전히 복원하여 1444년 3월에 완공했다. 콘스탄티노스가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하고 술탄의 성벽 철거 요구를 거부한 후 1446년에 튀르크인들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성벽을 사수할 결의를 굳히고, 최대 2만 명에 달하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방어했다. 1446년 성벽 전투는 압도적인 튀르크의 승리로 끝났고,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투라한 베이는 미스트라스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스의 영토를 황폐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파견되었고, 무라트 2세 술탄은 펠로폰네소스 북부에 자신의 군대를 이끌었다. 투라한이 미스트라스를 점령하지 못했지만, 무라드는 당시 모레아를 정복할 의향이 없었고 단지 공포를 심어주고자 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튀르크인들은 곧 황폐하고 인구가 감소한 반도를 떠났다.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휴전을 요청할 입장이 아니었고 무라드를 주군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조공을 바치며 다시는 헥사밀리온 성벽을 복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1448년 6월 테오도로스 2세, 같은 해 10월 요안니스 8세가 사망하자,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콘스탄티노스와 동생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가 대립했지만, 토마스는 어머니인 황태후 헬레나 드라가시 등과 함께 콘스탄티노스를 지지하여 그의 즉위를 실현시켰다. 이듬해 1449년 1월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미스트라스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자, 토마스는 디미트리오스와 함께 모레아 데스포타토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디미트리오스가 미스트라스를 행정부로 삼아 반도의 남동부를, 토마스는 파트라스를 행정부로 삼아 반도 북서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디미트리오스와의 공동 통치는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다. 두 사람의 개인적인 불화, 동서 교회 합동을 추진하는 친 라틴파 토마스와 합동에 반대하는 친 오스만 제국파 디미트리오스 사이의 종교적·외교적 차이 등, 수많은 대립 요소를 안고 있었다. 1453년 초 오스만 군의 반도 침공에 대해 두 사람은 협력하여 이를 격퇴했지만, 포위된 수도의 구원은 실현되지 않았다.

1451년, 무라트 2세 술탄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메흐메트 2세가 술탄이 되었다. 145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오스만 포위 공격 준비 단계에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모레아에 긴급 메시지를 보내 형제 중 한 명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도시 방어를 돕도록 요청했다. 모레아에서의 지원을 막기 위해 메흐메트 2세는 투라한 베이를 보내 다시 한번 반도를 황폐화시켰다. 마타이오스 아산이 지휘하는 군대가 튀르크의 공격을 격퇴했지만, 이 승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을 만큼 너무 늦었다.

1450년경 모레아 데스포타트. 토마스와 그의 형제 디메트리오스가 지배하던 지역을 보여준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의 대립은 표면화되었고, 영내의 유력자와 알바니아인 세력의 이반이 이에 박차를 가했다. 게다가 베네치아 공화국, 오스만 제국이 이러한 상황에 개입하여 영내의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사망 여파 속에서 새로운 오스만 정권에 가장 시급한 위협 중 하나는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생존 친척 중 한 명이 추종자들을 모아 제국을 되찾으려 할 가능성이었다. 메흐메트 2세에게 다행히도 모레아의 두 데스포트는 거의 불편함 이상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들의 칭호와 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몇 달 후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의 사절들이 아드리아노플에서 술탄을 방문했을 때, 술탄은 영토의 항복을 요구하지 않았고, 데스포트들이 매년 1만 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것만 요구했다. 모레아가 존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비잔티움 난민들이 데스포타트로 피난하여, 어느 정도 비잔티움 망명 정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마스와 디메트리오스는 협력할 수 없었고, 튀르크와의 싸움을 준비하는 대신 대부분의 자원을 서로 싸우는 데 낭비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직후, 모레아에서 데스포트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는 이 지역으로 이주한 많은 알바니아 이민자들이 현지 그리스 지주들의 행동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알바니아인들은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르와 같은 이전 데스포트들을 존중했지만, 현재의 두 데스포트들을 멸시했고, 콘스탄티노플로부터의 중앙 권력이 없어지자 그들은 스스로 데스포타트를 장악할 기회를 보았다. 알바니아인들을 스스로 물리칠 희망이 없자, 데스포트들은 그들을 도울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고 강력한 유일한 세력인 오스만인들에게 호소했다. 메흐메드 2세는 데스포타트가 알바니아인들의 손에 넘어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1453년 12월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반란은 투라한 베이가 1454년 10월에 데스포트들을 도와 이 지역에서 그들의 권위를 확고히 세울 때까지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다. 이 지원에 대한 대가로 메흐메드는 토마스와 디메트리오스에게 이전의 1만 두캇보다 많은 연간 1만 2천 두카트의 더 무거운 조공을 요구했다.

1460년 5월,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대군을 이끌고 직접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토의 병합에 나섰다. 디미트리오스는 항복하여 구금되었고, 토마스는 저항을 포기하고 베네치아 선박으로 케르키라 섬으로 탈출했다. 그의 지배 지역에서는 각 요새·도시가 개별적으로 저항을 계속했지만, 그 또한 같은 해 여름까지 대부분이 종료되었고, 디미트리오스의 지배 지역과 함께 반도 전토가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3. 3. 형제 간의 갈등과 제국 멸망

1400년경 비잔티움 제국 지도. 토마스가 1428년 모레아의 데스포트가 되었을 무렵, 그의 형인 테오도로스 2세는 이미 데스포트령(지도상 남쪽 영토)의 국경을 다소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 영토는 토마스와 그의 형제 콘스탄티노스 11세에 의해 거의 전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덮을 정도로 확장될 것이었다.


1428년, 토마스는 형제들과 함께 모레아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지만, 형제들 간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특히 황제 요안니스 8세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테오도로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 11세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다. 토마스는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지지했지만, 테오도로스 2세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1443년, 테오도로스 2세는 모레아 데스포트 직위를 포기하고 콘스탄티노스 11세와 토마스가 공동 통치하게 되면서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형제들은 모레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1431년 튀르크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던 헥사밀리온 성벽을 재건했다. 그러나 1446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2세는 다시 헥사밀리온 성벽을 파괴하고 모레아를 침공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와 토마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무라트 2세에게 조공을 바치고 성벽을 복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1448년, 요안니스 8세가 사망하면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황제가 되었다. 토마스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즉위를 지지했고, 이후 동생 디미트리오스와 함께 모레아를 공동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는 종교적, 외교적 견해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었다. 토마스는 서방과의 협력을 통해 제국을 부흥시키려 했지만, 디미트리오스는 오스만 제국과의 타협을 선호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면서 모레아는 제국의 마지막 영토가 되었다.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협력하는 대신 서로 싸우는 데 힘을 낭비했다. 게다가 모레아 내 알바니아인들의 반란까지 일어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1460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는 모레아를 침공했고, 토마스는 이탈리아로 망명하면서 모레아 데스포타트는 멸망했다.

4. 오스만 제국의 모레아 침공과 망명



1446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2세펠로폰네소스반도 북부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헥사밀리온 성벽을 사수하고 최대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무라드 2세는 모레아를 정복할 의향이 없어 물러갔다.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무라드를 주군으로 받아들이고 조공을 바치며 다시는 헥사밀리온 성벽을 복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1448년, 형제들의 공동 데스포트였던 테오도로스가 사망하고, 요안니스 8세 황제도 서거했다. 왕위 계승 후보는 콘스탄티노스, 데메트리오스, 토마스였으나,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스를 후계자로 생각했고, 어머니 엘레니 드라가시도 콘스탄티노스를 지지했다. 토마스는 콘스탄티노스의 즉위를 받아들였고, 콘스탄티노스는 데메트리오스를 모레아 데스포트로 임명하여 토마스와 함께 통치하게 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미스트라스를, 토마스는 코린토스와 북서부를 다스렸다.

1451년, 무라드 2세가 사망하고 메흐메트 2세가 술탄이 되었다. 145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오스만 포위 공격 준비 단계에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모레아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메흐메트 2세는 투라한 베이를 보내 모레아를 황폐화시켰다. 마타이오스 아산이 지휘하는 군대가 튀르크의 공격을 격퇴했지만, 너무 늦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1456년 토마스에 의해 서방으로 파견된 요안 아르기로풀로스


토마스와 데메트리오스는 술탄이 요구한 금액을 마련할 수 없었고, 정책 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데메트리오스는 서방의 지원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터키를 달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토마스는 교황청이 비잔티움 제국을 복원하기 위한 십자군을 요청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1453년 9월, 니콜라오 5세는 십자군 교서 ''Etsi ecclesia Christi''를 발표했고, 유럽 통치자들이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알폰소 5세는 5만 명의 군대와 400척의 함선을 이끌겠다고 약속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4만 명의 군대를 파병할 것을 제안했다. 1456년, 토마스는 요안 아르기로풀로스를 서방으로 파견해 지원 가능성을 논의했다. 십자군은 임박한 것처럼 보였고, 데메트리오스조차 반 라틴적 입장을 완화하고 사절들을 보냈으나, 두 형제는 외교에서조차 협력할 수 없었다.

4. 1. 서방과의 외교적 노력

1449년부터 오스만 제국에 함락될 때까지 토마스가 데스포트로서 통치했던 파트라스 성의 폐허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한 십자군은 결국 출정하지 못했다. 토마스와 데메트리오스 형제는 지원에 대한 확신과 재정적 어려움으로 3년 동안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1458년 5월, 오스만 군대는 코린토스를 공격했고, 메흐메드는 포병을 남겨 도시를 포위하는 동안 군대를 이끌고 토마스가 통치하는 북부 지역을 정복했다. 코린토스는 8월에 항복했고, 메흐메드는 모레아에 보복을 가했다. 두 형제의 영토는 축소되었고, 파트라스를 포함한 북서부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에 합병되었으며, 토마스는 미스트라스를 포함한 남부 지역만 유지할 수 있었다.

메흐메드가 떠나자 두 형제는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메흐메드의 승리는 형제간의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데메트리오스는 친오스만파로 돌아섰지만, 토마스는 서방의 지원을 기대했다. 1459년 1월, 토마스는 데메트리오스와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고 알바니아 영주들과 합류하여 모레아 중부의 많은 땅을 장악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지원을 요청했고, 평화를 중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휴전은 잠시뿐이었다. 조르조스 스프란체스는 두 형제가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서로 싸웠다고 기록했다.

토마스는 포로로 잡힌 터키 병사들을 로마로 보내 교황에게 자신이 성전을 벌이고 있다고 설득했고, 교황은 지아노네 다 크레모나 지휘하에 300명의 이탈리아 병사를 파견했다. 토마스는 우위를 점했고, 데메트리오스는 지원을 요청했다. 바실리오스 베사리온 추기경의 지지로 피우스 2세는 1459년 만토바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십자군을 설교하게 했다.

메흐메드는 그리스 정복을 결심하고 1460년 4월 군대를 소집하여 코린토스와 미스트라스로 이끌었다. 데메트리오스는 항복했고, 미스트라스는 1460년 5월 29일 오스만의 손에 넘어갔다. 모레아의 몇몇 지역은 저항했지만, 1461년 7월 살메니콘이 함락되면서 저항은 끝났다.

1460년대에 토마스가 모델이 된 성 바오로 동상.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위치.


메흐메트 2세의 침략 소식을 들은 토마스는 만티네이아로 피신했다가, 그의 수행원, 아내, 자녀들과 함께 메토니로 도망쳤다. 1460년 7월 22일 코르푸 섬에 도착했지만, 일시적인 피난처에 불과했다. 라구사는 입국을 거부했고, 메흐메트 2세는 토마스에게 사절을 보내 "우호 조약"을 제안하며 그리스 땅을 약속했다. 토마스는 메흐메트와 교황청 모두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메흐메트에게 간 사절은 체포되었다.

며칠 후 사절은 풀려나 토마스에게 직접 메흐메트에게 가거나 자녀를 보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토마스는 1460년 11월 16일 이탈리아로 향해 안코나에 상륙했다. 1461년 3월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 비오 2세에게 십자군을 요청했다. 토마스는 망명 생활을 하는 가장 높은 지위의 통치자였다.

로마에서 토마스는 비오 2세에게 황금 장미를 받고 거처와 연금을 받았다. 교황청 외에도 추기경들과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추가 지원을 받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토마스는 황제의 칭호를 주장하지 않았다.

핀투리키오가 그린 1464년 안코나에 도착한 교황 비오 2세. 그림 왼쪽 아래 파란색 모자를 쓴 인물이 토마스이다.


토마스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있는 성 바오로 동상의 모델이 되었다. 1462년 4월 12일, 성 안드레아 사도의 두개골로 추정되는 유물을 비오 2세에게 주었다.

1460년대에 십자군 원정 계획이 다시 진행되었다. 비오 2세는 콘스탄티노플 회복을 목표로 삼았고, 1459년 만토바 공의회에서 8만 명의 군대를 확보했다. 1463년 베네치아가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하면서 해군 지원이 확보되었다. 같은 해 10월, 비오 2세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했다. 토마스는 십자군 계획을 지지했다.

1462년 초, 토마스는 이탈리아를 순회하며 십자군 지원을 호소했고, 교황의 사면장을 가지고 다녔다. 토마스는 비오 2세의 편지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를 "고대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에서 태어난 왕자…지금은 이민자로서, 혈통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빼앗긴 남자"라고 묘사했다. 토마스는 왕족 카리스마와 잘생긴 외모로 호소했고, 만토바 대사는 그를 "훌륭하고 진지한 표정과 고귀하고 매우 장엄한 태도를 가진 잘생긴 남자"라고 묘사했다. 베네치아는 토마스에게 분노했는데, 데스포트 시절 베네치아 영토에 진출하고 형제와의 불화로 모레아 데스포트국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원정대는 없었다. 1464년 비오 2세가 사망하면서 십자군은 해산되었다.

1462년 8월 아내가 사망하자, 토마스는 자녀들을 로마로 불렀지만, 그들은 1465년 5월 12일 토마스 사망 후에야 도착했다. 토마스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매장되었고, 그의 무덤은 오스만 통치 초기 콘스탄티노플에서 팔라이올로고스 황제의 무덤이 파괴되는 것을 견뎌냈다.

4. 2. 로마에서의 죽음

토마스는 1462년, 파트라스의 수호 성인인 성 안드레아스의 두개골을 가지고 케르키라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건너갔다. 그는 이 성유물교황 비오 2세에게 바치고, 로마 거주 보증과 매달 300두카트의 수당을 받았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이후에도 펠로폰네소스 반도 탈환을 위한 십자군 결성을 호소했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1465년 5월 12일 로마 시내 바티칸 근처 산 스피리토 병원에서 사망했다.

로마 체류 중 토마스는 "키 크고 잘생긴 외모"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서 있는 성 바오로 동상의 모델이 되었다. 1462년 4월 12일, 토마스는 수세기 동안 비잔티움 제국이 소유했던 성 안드레아 사도의 두개골로 추정되는 귀중한 유물을 비오 2세에게 전달했다. 비오 2세는 밀비오 다리에서 베사리온 추기경으로부터 이 두개골을 받았다. 안드레아가 그의 친척인 로마인들(성 베드로의 상징적 후손)에게 돌아온 것으로 칭송받은 이 의식은 비오 2세의 무덤에 묘사되어 있다.

로마에 도착한 토마스는 비오 2세를 만났고, 비오 2세는 그에게 황금 장미를 수여하고 산토 스피리토 인 사시아 병원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며 매달 300두카트(연간 총 3600)의 연금을 지급했다. 교황청 연금 외에도 토마스는 추기경들로부터 매달 200두카트,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500두카트를 추가로 받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미 불안정한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그에게 코르푸로 돌아가지 말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토마스의 많은 추종자들은 그에게 제공된 돈이 데스포트를 부양하기에 겨우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교황청은 토마스를 모레아의 정당한 데스포트이자 비잔티움 제국의 진정한 상속자로 인정했지만, 토마스는 황제의 칭호를 주장하지 않았다.

1462년 8월 아내가 사망하자, 토마스는 코르푸에 남아 있던 자녀들을 로마로 불렀지만, 그들은 1465년 5월 12일 토마스가 사망한 후에야 로마에 도착했다. 토마스는 1464년 비오 2세 사망 후 로마 엘리트들에게 대부분 무시되고 잊혀졌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에 예우를 갖춰 매장되었고, 그의 무덤은 오스만 제국 통치 초기 콘스탄티노플에서 팔라이올로고스 황제들의 무덤이 파괴되고 제거되는 것을 견뎌냈다. 대성당 내 그의 무덤을 찾기 위한 현대의 노력은 아직까지 결실을 맺지 못했다.

5. 유산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역사에서 뚜렷한 개성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의 성격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으며, 온순하지만 자아가 약한 인물이라는 설과 반항적인 귀족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냉혹한 인물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이는 역사서가 그를 단편적으로만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상의 수수께끼는 그의 형제들인 테오도로스 2세, 디미트리오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법의적 재구성. 1547년부터 1584년까지 최초의 대러시아 차르였던 이반 4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그의 딸 조에(소피아) 팔레올로기나를 통해 이반 뇌제의 증조부였다. 비잔티움 황실과의 혈연 관계는 러시아가 "제3의 로마"임을 주장하는 데 힘을 실어주었다.


그의 딸 조에(소피아) 팔레올로기나이반 3세의 결혼은 모스크바가 비잔티움 제국의 이념적, 정신적 계승자인 "제3의 로마"임을 주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러시아의 초대 대러시아 차르인 이반 뇌제는 소피아의 손자였다.

5. 1. 자녀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와 그의 아내 카테리나 자카리아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자녀
이름출생 - 사망배우자 및 기타
헬레나 팔레올로기나1431년 – 1473년 11월 7일라자르 브란코비치와 결혼. 세르비아 데스포트의 아내. 수녀가 되어 레프카다 섬에서 사망.
조에 팔레올로기나 (소피아)circa영어 1449년 – 1503년 4월 7일이반 3세와 결혼. 모스크바 대공비. 모스크바 제3의 로마 주장에 영향을 줌. 이반 뇌제의 증조모.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1453년 1월 17일 – 1502년 6월모레아 데스포트의 상속자.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 칭호를 주장. 샤를 8세에게 황제 칭호에 대한 권리 양도.
마누엘 팔레올로고스1455년 1월 2일 – 1512년 이전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메흐메트 2세에게 의탁.



조르지오 스프란체스가 제시한 자녀 수와 일치하지만, 스프란체스는 토마스의 가족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스프란체스가 언급하지 않은, 유아기에 사망한 딸(이름은 알려지지 않음)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5. 2. 후대의 평가

토마스는 역사 속에서 개성이 뚜렷하지 않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 자신의 인격이나 내면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으며, 어떤 말이나 목소리도 (그것이 정말로 그의 말이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온순하지만 자아가 약한 인물이라는 설과, 반항적인 귀족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냉혹한 인물이라는 설 두 가지가 있지만, 이것은 역사서가 그를 언급할 때 조연으로서 단편적인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상의 수수께끼는 형인 테오도로스 2세, 디미트리오스 등에게도 공통적인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토마스는 카테리나 자카리아와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스프란체스가 제시한 숫자와 일치한다. 이 네 명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이름출생사망기타
헬레나 팔레올로기나1431년1473년 11월 7일라자르 브란코비치와 결혼. 세르비아 데스포트의 아들.
조에 팔레올로기나circa|약영어 1449년1503년 4월 7일이반 3세와 결혼. 모스크바 대공.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1453년 1월 17일1502년 6월"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 칭호 주장.
마누엘 팔레올로고스1455년 1월 2일1512년 이전오스만 술탄에게 의탁.



조에(소피아) 팔레올로기나이반 3세의 결혼은 모스크바가 비잔티움 제국의 이념적, 정신적 계승자인 "제3의 로마"임을 주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러시아의 최초 대러시아 차르인 이반 뇌제는 소피아의 손자였다.

스프란체스는 토마스의 가족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는 토마스의 부인이 사망 당시 70세였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그녀가 마누엘을 65세라는 믿기 어려운 나이에 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마스에게는 스프란체스가 언급하지 않은 적어도 한 명의 자녀, 즉 유아기에 사망한 딸(이름은 알려지지 않음)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프란체스의 저술 이후의 후대 자료들은 토마스에게 귀속된 자녀 수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샤를 뒤프레느 뒤 캉주(1680)와 같이 스프란체스가 언급한 네 명의 자녀를 동일하게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안토니오 알비치(1627)와 같이 두 명의 자녀(안드레아스와 마누엘)만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레오 알라티우스(1648)는 세 아들(존, 안드레아스, 마누엘)을 제시한다. 이는 토마스 사후 비교적 짧은 시간 후에도 그가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 불분명했음을 의미한다.

족보학자 피터 말라트는 1985년 이러한 불확실성과 토마스의 알려진 장녀 헬레나가 둘째 딸 조에보다 거의 20년 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근거로 토마스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네 명보다 더 많은 자녀를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17세기 이후의 일부 후대 이탈리아 족보에는 토마스의 아들이 두 명 더 있는데, 로제리오라는 사생아와 또 다른 토마스라는 합법적인 넷째 아들이 있다. 로제리오와 젊은 토마스의 존재는 현대 학계에서 환상으로 일축된다. 15세기에 "모레아 데스포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라는 기록이 있는데, 1444년에 여왕 이사벨라 드 클레르몽의 여동생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어 (토마스가 당시 결혼하여 모레아를 통치했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둘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존재에 대한 희박한 증거가 있다. 로제리오의 존재는 몇 개의 인증되지 않은 문서와 그의 추정되는 후손인 "팔레올로고 마스트로지오반니"의 구전 전통에 근거한다. 개별 문서 자체에는 의심스러운 내용이 거의 없지만, 전체적으로 검토하면 모순되며 반드시 토마스가 로제리오라는 아들을 두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스프란체스는 1453년 1월 17일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의 탄생에 대해 그 소년이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계승자이자 상속자"였다고 썼는데, 안드레아스가 토마스의 장남이 아니었다면 이 문구는 거의 의미가 없다(로제리오와 젊은 토마스가 존재했다면 안드레아스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페자로에 살고 있는 팔레올로고스라는 성을 가진 가족은 존이라는 세 번째 아들을 통해 토마스로부터 계승되었다는 주장을 했다. 이 가족은 나중에 주로 콘월에 살았고, 군인이자 고용 암살자로 일했던 테오도르 팔레올로고스와 17세기 후반 바베이도스에서 은퇴한 퍼디낸드 팔레올로고스와 같은 인물이 포함되어 있다. 존이라는 토마스의 아들의 존재는 동시대 기록에 그 이름의 아들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다. 존이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있는데, 토마스의 사생아였거나, 알려진 아들 안드레아스 또는 마누엘 중 한 명을 통해 그의 손자였을 수도 있다. 존의 존재는 1648년 알라티우스가 이 이름의 아들을 언급한 것으로 뒷받침될 수 있지만(이는 독립적인 출처로 작용하기에는 너무 늦다) 그리고 페자로의 동시대 문서에서 레오네 팔레올로고스(레오네와 존은 라틴어 형태에서 유사하다. ''Leonis''와 ''Ioannes'')가 거기에 살고 있다고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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